소흥 주씨
소흥은 많은 유명 인물을 배출했다. 대우, 구천, 육유, 왕희지, 왕양명… 근대에는 주씨 집안이 그 중심에 있다. 소흥 주씨의 조상은 ‘진흙 속에서 나와도 물들지 않고, 맑은 연못에서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고 한 주돈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이전의 계보는 불분명하므로 당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 소흥 주씨 가문에서는 분명히 유명 인물이 나왔다. 루쉰과 저우언라이다. 두 사람의 고향은 소흥 구시가지 내에 있으며, 두 집은 약 2km 떨어져 있다.
저우언라이는 소흥에서 태어나 살지 않았지만, 그는 소흥 주씨 가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루쉰의 아내 허광핑을 ‘숙모’라 불렀고, 국빈 만찬에서 소흥의 황주를 추천했다. 이는 왕희지의 ‘난정서’에서 성인들이 ‘류상곡수’ 게임을 할 때 사용된 술이다. 또한 소흥의 원숭이극을 북경으로 초청하여 공연하게 하였으며, 이는 나중에 서유기의 손오공 탄생으로 이어졌다.
반면 루쉰은 소흥에서 태어나 17세까지 소흥에서 살았다. 루쉰의 작품에는 백초원, 삼미서옥, 사희, 윤토, 두부서시, 샹린, 콩이치, 아큐 등 소흥의 다양한 인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만으로 루쉰이 농촌 출신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또한 책상에 ‘조’ 자를 새기며 루쉰처럼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더욱 큰 착각이다. 루쉰이 북경에서 사합원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학습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루쉰이 책상에 ‘조’ 자를 새긴 것은 그가 당시 13세였고,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돌보는 동시에 학교에 가야 했던 루쉰은 자주 지각했다. 삼미서옥까지는 겨우 500m였지만, 아버지를 위해 집안 물건을 저당 잡히고 약을 사러 가는 과정에서 시간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병에 걸린 이유는 루쉰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위해 관직을 사려다가 발각되어 상하이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관청은 할아버지를 잡지 못하자 아버지를 감옥에 가뒀고, 나중에 할아버지가 자수하면서 아버지를 석방했지만, 이미 겁에 질린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장남인 루쉰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아버지를 돌봐야 했고, 동시에 집안의 종친 회의에도 참석해야 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 그는 책상에 ‘조’ 자를 새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면, 루쉰의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관직을 사줄 능력이 있었고, 루쉰은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윤토가 수박밭에서 고슴도치를 잡고 있을 때, 루쉰은 종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루쉰의 집을 방문해 보면(5A급 무료 관광지),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방문객들은 “루쉰의 집이 이렇게 컸다니”, “루쉰이 이렇게 부자였구나”라는 감탄을 자주 내뱉는다. 주가 대문은 세 개가 있으며, 길 건너에는 신원의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루쉰의 집은 종친과 이웃에게 모두 털린 뒤에도, 북경에 13명의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합원을 구입할 수 있었다.
주가 가문의 몰락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